[에세이] OOOOO의 의미
MT 후기 | 현재호
2019년 삼일절에 디자인학교 MT를 다녀왔다. 스무 명 남짓 모여 봉고차 2대와 승용차 1대로 강화도에 다녀왔다. 디자인의 언어로 샤워를 하고 푹 젖어 집에 돌아온 느낌이다. 비유적으로 샤워라고 표현했지만 대부분이 아주 피곤했다.
같이 갔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감상을 요구했다. 나는 헤어질 시간에 즉석으로 MT에 대한 감상을 말할 수 없었다. '좋았다' 라고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저 '좋았다'로, 과거의 경험으로 감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왜냐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로 인해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좋음은 구체적인 경험에 대한 좋음이 아니라 무엇에 대한 좋음일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있던 차에, 딱 나의 좋음 같은 글을 발견했다.
이 땅 위에 사람이 살기 비롯한 것도 오래되거니와, 앞으로도 사람은 오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사람의 삶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허둥지둥하게 된다. 짐작이 안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없어져 버리거나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세상은 버티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짐작을 가지고 살고 있건 아니건, 아랑곳없다. 그럴 때 사람은 산다느니 보다 목숨을 이어간다는 말이 옳겠다. 다시 말하면,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 삶을 탐탁지 못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를 쓴다. (최인훈, 광장_일역판 서문)
난 이 부분에서 디자인학교가 생각났다. 소설가 고 최인훈이 짐작이라고 한 표현을 난 Vision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짐작이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디자인학교 강화도 MT는 짐작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난 짐작(비전)이야말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구심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짐작을 제공하고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디자인학교라는 것을 알았다.
최인훈은 삶의 짐작 없이 인간은 살지 못하고 살아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디자인학교에 모여있는 인원들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 짐작을 공유하고 있다. 디자인학교의 짐작을, 서로 가르쳐주고, 같이 깨닫고 그러기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내일 뭐 하지? 더 나아가 내 년에 뭐하지? 라고 물었을때, 디자인 학교에서 멋있는 사람들과 같이 공부한다고 할 그런 짐작이 내가 생각하는 좋음이고 그 좋음은 그대로 삶의 의미가 된다.